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 떨어진 눈송이는 땅 위로 나무 위로 지붕 위로 그 힘겨운 무게를 내려놓으며 도시의 소음도 함께 삼켰다. 익숙한 소음이 사라지고 드러난 자연의 소리는 하얀 침묵에 가까운 낯선 풍경을 만들며, 둔탁한 소음에 물들었던 도시의 색을 걷어내고 소박한 빛을 돌려주었다. 눈(目) 앞에 익숙한 세상이 눈(雪) 속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었다. 문득, ‘입력되는 소리에 따라 색이 조합되는 방식이 바뀐다’는 확률 개념을 설명하던 이지원 작가의 말들을 떠올려본다. 떨어지는 눈(雪)의 소리가 세상의 풍경을 바꾼 것일까 혹은 하얗게 변한 세상이 침묵이라는 소리를 보게(目) 한 것일까? 모든 향나무가 자신이 속한 땅의 바람에 따라 수형이 바뀌듯이, 모든 장소가 그 지역의 소리를 삼키고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익숙한 소리를 익명의 무엇으로 바꾼다면, 어떤 색의 풍경이 만들어질까? 라는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해본다.
종말과 혐오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책감으로 느껴지는 오늘날, 잠깐이나마 이런 천진난만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태초의 지구와 함께 해온 눈(雪)이라는 오래된 결정체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전까지 손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핸드폰을 쥐고 사는 우리에게 ‘당신이 보는 것이 소리이고 언어의 공간입니다’ 라고 화면을 띄우며 운을 건네는 한 작가의 상상력 덕분이다. 듣는 것을 보고, 소리의 색을 발견하고, 언어의 부피를 더듬는 이지원의 상상력은 오늘날 실재(Real)는 어떻게 가상(Virtual)이 되는가 그리고 가상은 어떻게 실재가 되는가? 라는 실존적인 질문과 함께 인간의 오래된 (이제는) 퇴화된 전체(Wholesome)의 감각을 불러온다.
이지원 작가는 인간의 지능이 송두리째 챗 GPT에게 넘어가기라도 할 듯 불안과 위기 속에 인류의 창의력과 윤리의식을 재증명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작가세대 답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시청각 미디어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가 제안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개념은 미래의 인류를 위한 생존 조건으로서 급진적인 희망이나 인류를 뛰어넘는 초현실적 (오래된) 유토피아가 아닌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공간을 리모델링(remodeling)하는 자기만의 세상으로서 (새로운) 유토피아이다.
2020년 코로나(Covid-19)와 함께 단절된 일상의 물리적인 이동과 관계적 고립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가상공간을 통한 이동과 만남이 가능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타지역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올린 동영상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이나마 여행을 하고, Zoom이라는 웹 플랫폼을 통해 최소한의 수업과 업무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던 가까운 이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먼 미래를 위한 기술이 자연스럽게 혹은 절대적으로 우리 손 안에 쥐어졌으며, 우리는 어느 기술자보다 유용하게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고, 어느 발명가보다 창의적으로 사용하며, 어느 사업가보다 빠르게 확장시켰다. 그 이전에 사실(non-fiction)가 이미 허구(fiction)를 앞질렀다면, 코로나는 어느때 보다도 더 빠르게 사용자(user)가 개발자(developer)를 추월했던 시기였다. 이지원이 “신생(New Bor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구축하고, <신생공>과 <신생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은, 개념의 변화와 변용의 시대에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써 ‘공간’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서 ‘이동’과 ‘소통’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사유가 절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사실, 예술과 기술의 관계는 서로 양립한다. 예술과 기술은 물질과 데이터, 감각과 논리, 상상과 가설, 주관과 객관 이라는 각자의 스펙트럼 끝에 따로 ‘거주’하며, 그 충돌은 불현듯 의도하지 않은 회로의 합선으로 발생하는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이면서도 불편하다. 이지원 작가는 이러한 논리와 감각의 경계 너머 둘의 접촉이 발현하는 순간을 붙잡는다. 그 순간을 붙잡는 것은 예술가의 전통적인 도구가 아닌 인공지능의 데이터들이다. 이지원 작가가 구축하는 새로운 개념의 세계는 예술과 기술이 동시에 양립할 수 있는 “신생” 즉 “새롭게 태어난 New Born” 미지의 세계이다. 이지원 작가는 스스로 마저도 “둘”이라고 명명하면서, 서로 다른 하나가 통합된 둘 혹은 서로 다른 각각의 하나가 연결된 둘이라는 ‘이상향’을 곤고히 한다. 이 둘은 눈과 귀일 수도 있고, 소리와 장소일 수도 있고, 언어와 공간 또는 물질과 빛과 같은 구체적인 개체일 수도 있겠다. 혹은 지각과 인식, 기표와 기의, 논리와 감각과 같은 철학적 의제까지로 확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진취적인 세계관을 차지하고서라도 그의 “신생”은 태어남이라는 에너지의 영역으로서 근본적으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공(空)의 물성’을 가진다.
이지원의 최근작 <신생공 v2.0.2>(2024)는 프랑스, 독일, 한국 등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수집한 -인공적 소음을 (최대한) 완벽히 제어한- 자연의 소리를 데이터화 하여 영상으로 제작된 가상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소리의 파동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하는 풍경이기 때문에 사실 존재하지 않는 공(空)의 영역으로 치환된다. 마치 오랜 시간 입자설에 갇혀있던 빛이 양자역학의 파동설 덕분에 세상의 장애물과 회절, 간섭 그리고 굴절이라는 다양한 물리적 곡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듯이, 소리의 파동은 색으로 환원되어 모니터의 빛으로 전환된다. <신생어를 위한 디스플레이 1,2,3> (2024)은 세 개의 휘어지는 LED 메트릭스가 자이로스코프 형태로 얽혀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든다. 공중에 띄어진 팽이 고리 모양의 매듭은 마치 하나의 행성처럼 어두운 공간에 빛을 발하며 반짝인다. <신생어를 구사하는 발화체>는 신생어에 대한 작가의 개념을 이해한 챗GPT가 쓴 시를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읽어 그 소리 값으로 새로운 언어를 조합한 시대착오적 로봇일 뿐이다.
<신생공>과 <신생어>가 동시에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생공>의 재료로서 소리의 파동(wave)과 <신생어>의 공간으로서 언어의 부피(volum)는 모두 출발점과 목적지를 이은 경로에서 벗어나는 속성을 가진다. 소리가 공간에 부딪혀 울리고, 빛이 수면을 통과해 굴절하고, 언어가 타자에 의해 번역되면서 무한증식으로 변형되는 이지원의 세계는 공간과 언어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헵타포드의 동시적인 의식 양태[1]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서있고, 이동하고, 인식하고 그리고 존재하는 시공간의 차원이 서로 연결되어 자유롭게 관통하며, 단순히 어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데이터의 바다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공(空)의 세계. 보다, 듣다, 그리고 말하다 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인지 체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맥락화하고 탈맥락화는[2] 이지원의 세계는 오히려 어쩌다 둘로 나누어진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당연한 오래된 섭리일지도 모른다. 오염되고 왜곡된, 어쩌면 참담해질 수 밖에 없는 인류의 미래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잠시 디스토피아라는 파동의 중첩을 거쳐 일종의 보강과 상쇄가 교란되고 있을 뿐, 곧 다가올 새로운 파장, 유토피아로 진입하고 있다고.
글.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
[1]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 (엘리)
[2]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새로움(on the new)에 대해서, 모든 혁신은 문화적 태도나 행위의 새로운 해석, 새로운 맥락화 또는 탈맥락화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